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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역사_독일공작연맹

예올 2022. 10. 4.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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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공작연맹

독일에서 유겐트슈틸을 극복하고 현대 디자인으로의 이행을 뚜렷하게 보여 준 기관은 독일공작연맹으로 1907년 뮌헨에서 미술가, 건축가, 사업가, 공직의 대표자들이 모여 설립했다. 이들은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을 본보기 삼았지만 현대의 산업적인 생산조건들을 인정하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독일공작연맹은 기계를 적대시하지 않고 오히려 산업을 통한 개혁의 길을 추구했다. 규정에 따르자면 그 목표는 '미술과 산업, 그리고 수공업의 협동을 중심으로 한 산업 활동의 개선'이었다. 이는 독일의 제품들이 국제 시장에서 다시금 경쟁력을 갖도록 만들고, 산업적 대량 생산품들을 미술적인 요구에 맞도록 고품질로 간결하게 디자인하며, 노동자들도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독일공작연맹의 창립 회원으로는 무테지우스, 반 데 벨레, 베렌스, 오스트하우스, 자유주의 정치가인 나우만과 슈미트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특히 슈미트는 드레스덴 공방의 관장으로서 1906년 자신의 전시에서 산업적 대량 생산을 위해 전력투구했다. 

독일공작연맹은 1914년 쾰른에서 그 유명한 공작 연맹 전시를 함으로써 대단히 커다란 영향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시리즈 가구들과 생활용품들 외에도 침대 차량 인테리어와 베렌스의 제자 그로피우스의 강철과 유리의 대담한 구조로 이루어진 현대적인 모델 공장이 전시되었다. 

같은 해에 시작할 때부터 공작 연맹을 둘로 갈라놓았던 논쟁이 그 절정에 달했는데, 바로 규격화 문제였다. 무테지우스는 오로지 디자인의 규격화를 통해서만 쓸모 있는 산업적 형태를 이룰 수 있고 수명이 오래 가는 저렴한 대량 생산품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반 데 벨데는 미술가들의 개성을 살리는 디자인 활동을 옹호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이 논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사회적 문제들이 증가하면서 사람들은 노동자 주택 건설과 저렴한 인테리어 용품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러한 노력의 정점은 1927년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 집단 주택 단지와 함께 그 유명한 공작 연맹 전시인 '주택'에서 나타났다. 이 전시는 '모던'과 새로운 건축 이론을 지지하는 자들의 국제적 토론장이 되었다. 하지만 공작 연맹 내부에는 새로운 건축을 반대하는 견해들 역시 존재했으며, 공작 연맹의 회원들 가운데 보수적인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국가사회주의로의 획일적 통합마저도 환영하는 성급함을 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다시 새롭게 설립한 공작 연맹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으나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순 없었다. 어쨌든 독일공작연맹은 바우하우스와 나란히 현대 디자인의 발전을 이룩한 대표적인 기관이었다. 

 

아에게와 페터 베렌스

1883년에 라테나우가 설립한 아에게 사는 1907년에 이미 제너럴일렉트릭스, 웨스팅하우스, 지멘스 같은 세계 굴지의 종합 전기 회사로 성장했다. 19세기 말에는 바로 이와 같은 전기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미래의 유망 산업으로 발전했다. 아에게는 산업용으로 쓰이는 발전기, 터빈, 변압기, 전기 모터 등을 생산하는 한편, 다른 쪽으로는 전구, 선풍기, 시계, 물 주전자, 전기 가습기 등 가정용 전기 제품의 생산을 점점 더 늘려갔다. 

아에게는 이미 일찍부터 미국의 선례를 따라 가장 현대적인 기계들과 합리적인 경영, 생산 방식을 갖추고 급성장하여 자매 회사인 전기 은행, 지주 회사 등을 설립했다. 1910년에는 이미 7만 명 이상의 사원들을 거느리고 국제적 협약을 체결하여 세계 시장을 나누어 갖는 등 '소설 같은 발전'을 거듭했다. 그래서 아에게는 현대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자신의 진면목을 밖으로도 나타내고자 했다. 그러려면 제품을 현대적으로 훌륭하게 디자인함으로써 독일의 산업 생산품에 대한 나쁜 평판을 종식시키고, 여전히 남아 있는 새로운 기계 사용에 대한 두려움에 맞서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라테나우는 1907년 페터 베렌스를 미술 고문으로 고용했다. 

당시 베렌스는 뮌헨 공방과 다름슈타트 예술가 마을의 공동 설립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1903년부터 1907년까지 뒤셀도르프 공예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래픽에서 건축에 이르는 다방면의 작업들을 통해 유겐트슈틸을 벗어나 즉물적이고 기능적인 형태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아에게에서는 1906년에 처음으로 광고 자료를 디자인했고, 1907년부터 회사의 모든 분야에 걸친 디자인을 책임졌다. 

1907년에서 14년에 이르는 동안 베렌스는 기업의 전체 이미지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카탈로그와 가격 목록, 전기 제품들뿐 아니라 노동자 주택과 박람회의 전시 부스, 공장 건물까지 디자인하여 모든 것들을 소비자에게 알맞도록, 하지만 매우 즉물적이고 기능에 적합한 형태로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베렌스는 '기계로 생산되는 모든 사물들에 과도한 치장이나 장식이 없는 미술과 산업의 불가분의 결합'을 추구했다. 

이렇듯 미적으로 수준 높은 즉물적이고 현대적인 형태 언어를 통해 아에게는 신생 산업의 선두 주자로서 문화 분야에서는 명성을 얻고자 했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편지 봉투에서부터 공장 시설에 이르기까지, 기업의 자기표현이 시장에서의 판매 가능성을 높이는 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아에게는 베렌스의 작업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완벽한 코퍼레이트 아이덴티티를 구축한 최초의 기업이 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따를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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