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로 가는 길
아르누보는 한편으로 과거를 향한 회귀였으며 지나치게 수공업적이고 사치스러웠다. 다른 면에서 보더라도 산업화의 전반적인 문제를 인식했던 개혁 의지 또한 '자연으로의 회귀'라는 도피로 인해 시작조차 못 한 실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르누보는 결코 통일된 양식이 아니었다. 화려한 식물적 문양들과 고가의 사치스러운 가구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장식을 거부하는 즉물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들도 존재했다.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은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형태, 방법론, 사물의 기능에 관한 이론적 성찰, 산업을 대하는 태도 등을 통해 현대의 개척자가 되었다. 현대 디자인의 도입에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초기에 단계에서 건축과 그 방법론에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졌다는 것이다.
앙리 반 데 벨데 같은 아르누보의 대표 주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즉물적인 형태 언어를 추구하거나, 베렌스처럼 산업에서 새로운 사명을 찾는데 관심을 쏟았다. 1907년에 설립된 독일공작연맹 같은 개혁 운동과 단체 기관들에서는 이제 미술가의 역할과 더 이상 무시할 수만은 없는 산업적 대량 생산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매킨토시와 글래스고 미술 학교
아르누보의 개화기에 이미 새롭고 실용적인 형태들이, 영국에서의 움직임들과는 상관없이 스코틀랜드의 항구 도시 글래스고에서 태동했다. 여기에는 '글래스고 미술 학교'를 중심으로 한 건축가와 미술가들은 1890년에 이미 일본 미학의 영향을 받아 장식을 정제하고 약간의 파스텔 색조 외에는 흑백을 선호하는 스타일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모던'이라는 경향이었다. 이 그룹의 중심인물은 매킨토시였는데, 그의 기하학적인 형태와 평면적인 수평 수직의 갸름한 판재형 구조는 모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매킨토시는 영국보다는 유럽 대륙에서 이름을 떨쳤다. 특히 빈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1900년의 제8회 제체시온 전시에서 현대 디자인의 본보기로 추앙되기도 했다.
1900년 전후의 빈
1897년 빈에서도 분리파가 형성되었다. 빈의 제체시온 스타일 또한 다른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아카데미와 역사주의에 대항하는 것이었고, 종합예술과 수공예 개혁의 이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각별히 매킨토시의 영향을 받아 직각과 엄격한 선의 흐름이 특징인 명료한 형태 언어가 전개되었다. 제체시온의 창립자는 클림트와 모저, 그리고 예순을 바라보는 건축가 바그너였다. 빈 모던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바그너는 엄격한 고전주의의 대표자인 만큼 그에게 있어 즉물적이고 현대적인 형태로의 전환은 어떠한 단절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가구들 역시 매우 엄격하게 디자인했다. 대표적인 작품인 '빈의 우체국 은행'을 보면 이러한 방향이 분명히 나타난다. 창구가 있는 홀은 높으면서도 가볍게 휜 강철 프레임 구조로 이루어졌고, 실내 공간은 밝고 즉물적이며 과도한 장식 없이 기능적으로 디자인되었다. 구조 역시 현대적 재료들과 마찬가지로 가시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온풍기나 알루미늄 기둥 마감재, 그리고 강철 프레임의 연결용 리벳의 머리조차 하나도 숨김없이 노출되었다.
바그너의 제자인 호프만 역시 건축과 디자인에서 즉물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 언어를 대변했다. 그의 주요 작품인 '푸르커스도르프의 요양소'는 이미 현대적인 평지붕으로 건축되었고, 요양소 내의 생활용품들은 지금까지도 모던한 느낌을 주고 있다. 1903년 호프만과 모저가 제체시온에서 설립한 '빈 공방'이 출범했다. 그러나 이 공방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유희적이고 사치스러운 미술 공예로 기울어졌다. 또한 초기의 빈 모던 그룹에는 '빈 공방'을 반대했던 로스도 있었는데, 그는 장식의 절제를 넘어 장식 그 자체를 완전히 거부했고, 수많은 이론 관련 출판물들을 통해 순수하게 기능적인 디자인을 주장했다.
이렇듯 빈에서는 아르누보를 극복했고, 호프만과 모저의 즉물적인 디자인들은 독일공작연맹과 바우하우스에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교양 있는' 유럽의 양식을 선호하는 것 외에도 그 필연성과 기술적인 실현 가능성을 주지하는 실용주의가 확산되었다. 여기에서 '모던'은 산업적인 대량생산을 둘러싼 문제였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중공업과 철강 산업의 메카이자 곡물과 육류의 저장고였던 시카고는 초기 모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의 대규모 도살장에서는 최초로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기도 했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로서 1900년경에는 인구가 1,700만 명에 이르렀다.
시카고에 마천루 건설을 촉진시킨 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도시 전체를 파괴시킨 1871년의 끔찍한 대화재와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새로운 철골 건축방식, 그리고 높은 땅값이었다. 이 새로운 건축방식의 가장 대표적인 선두 주자가 바로 설리번이었다. 그는 현대 건축의 아버지이자 초기 기능주의 이론가였다. 또한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면서도 무수히 인용되어 왔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 말의 근본이념은 바우하우스와 울름 조형대학을 거쳐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기능주의의 대표자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 찰스레니 매킨토시(1868-1928)
건축가이자 미술가로 글래스고 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영국식 고딕과 극동 지역의 미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매킨토시는 건축, 가구, 직물 등을 디자인했고, 허버트 맥네어와 마거릿, 프랜시스 맥도널드 등과 함께 현대 디자인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