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에서 포스트 모던으로
안티 디자인의 급진적 운동들은 1960년대 말, 대중 매체를 통해 많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몇 년이 지나자 그 대부분이 이렇다 할 소득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처음에는 사회 비판적이었던 팝 가구들도 그저 유행을 타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는 여전히 해마다 '연방 정부의 굿 포름 상'을 수여했다. 저항 운동이 부연 준 유토피아는 산업 사회의 구조들에 비해 나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쨌거나 소비자 입장에서는 1970년대의 수많은 새로운 미적 영향들로 인하여 다원주의라는 기호와 양식의 폭넓은 다양성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굿 포름'과 기능주의의 독단적인 주장들에 대해 다양한 생활 양식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 등과 같은 방식의 단순 분류는 점점 복잡해지는 현대 산업 사회의 사회적 구조를 설명하기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
산업 국가는 각 개인의 취향과 양식이 매우 다양화되다 보니 과거에 기능주의가 했던 것처럼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개인의 다양한 취향과 기능주의의 정서 결핍, 그리고 사물이 갖는 기능의 다양성에 대한 자각으로 1970년대 들어 건축에서부터 모던에 대항하는 경향들이 생겨났다. 이는 모던의 문제들을 제기했던 급진적 운동들보다 정치적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더 성공적이었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이 개념은 1980년대에 과열된 논쟁에서 확대 해석되었을 뿐 아니라 지엽적으로 이용되거나 논박을 위해 사용되었다. 포스트 모던에서 가장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역사적 양식의 인용과 그 조합은 이러한 논쟁에서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주요 쟁점이었다.
포스트 모던 이론
특히 팝 문화에 고무되었던 1960년대 후반에는 문화 영역 전반에 걸쳐 '좋은 것'과 '나쁜 것', '굿 포름'과 '키치', '고급문화'와 '일상 문화' 등의 엄격한 구분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나타났다. 모던으로 대변되었던 형태와 기능의 단순한 관계 역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포스트 모던은 역사적인 인용, 키치와 화려함, 개성과 현란한 색채 등을 사용하여 배타적으로 경직된 모던의 무미건조한 합리적 형태들에 반란을 일으켰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개념은 이미 19세기에 등장한 것으로, 1960년대 초 문학 비평에서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뒤에 이어 포스트 모던은 건축과 사회 과학, 정신 과학(일반적으로 인문 사회과학이라고 부른 과학 분야) 등에 적용되었다. 철학에서는 1979년경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포스트 모던을 둘러싼 논쟁은 1980년대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포스트 모던 건축
미국에서는 벤투리가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1966)과 '라스베이거스의 교훈'(1971)에서 반기능주의 테제를 체계화했다. 라스베이거스의 상업용 건축물과 광고용 설치물 등의 상징적 의미가 건축물의 기능을 새롭게 평가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 후 젱크스가 포스트 모던의 '개념'을 건축으로 옮겨 왔다.
포스트 모던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역사적 양식의 인용, 장식적인 요소, 기호적이고 상징적인 요소, 그리고 역설적인 요소 등으로 건물의 기능을 새로운 방식으로 시각화하거나 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거나 또는 그것과 전혀 관계없이 보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들이었다.
포스트 모던 디자인
포스트 모던 개념은 건축에서 디자인으로 옮겨 갔으나 가구나 역사적 건축물 형태를 인용한 제품들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포스트 모던 디자인의 본질은 매우 다양한 요인들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동안 기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강한 색채의 기호적인 표면 디자인, 오브제의 사용과 관련된 외관의 재해석, 역사적인 요소들의 인용과 조합, 거기에서 기능주의 원칙과 완전히 상반되는 사치스러운 장식과 미니멀한 형태, 고급 재료와 키치 등이 함께 사용되었다. 형식상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포스트 모던은 무엇보다 모던의 독단에 대한 해방의 일격이었으며, 구조적으로는 전자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그에 따른 산업과 사회의 구조 개편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스튜디오 알키미아
좁은 의미에서 최초의 포스트 모던 디자인 제품은 이탈리아 그룹 '알키미아'와 '멤피스'의 가구들을 들 수 있다.
1976년에 구에리에로가 밀라노에서 '스튜디오 알키미아' 그룹을 결성했으며, 이 그룹의 이론적 대표는 멘디니였다. 이 그룹의 철학은 즉물적이고 생산 기술 지향적인 대량 산업의 기능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1960년대의 래디컬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나 어떠한 정치적 입장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포스트 래디컬 토론회'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목표는 현대 대량 생산 제품의 차가운 기능성에 대항하여 사용자와 사물 간의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제품의 대량 생산 역시 추구하지 않았고 사물의 사용 가능성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재치가 넘치는 환상, 시적이며 역설적인 표현력이 최우선 순위였다. '알키미아'라는 이름은 일상적인 재료들로 금을 만들고자 했던 중세의 연금술, '알키미'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알키미아'는 현란한 색상과 매다는 장식으로 '값 싼' 일상 사물들을 디자인 오브제로 바꾸어 놓았다.
이밖에 또 다른 경향은 '리디자인(Redesign)'으로 현대 디자인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외형적으로 수정 보완하는 것이었다. 매킨토시에서 바우하우스의 의자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제품들을 작은 깃발이나 화려한 장식, 또는 구슬 등으로 치장했고, 이를 통해 역설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알키미아'의 주요 표현 수단은 드로잉과 전시, 그리고 퍼포먼스였다. 여기서는 시적인 건축 디자인, 의상, 비디오, 무대 장치 등이 선보였다. 디자이너, 미술가, 건축가 30명이 모여서 원하는 대로 서로 조합할 수 있도록 문손잡이와 가구의 다리, 바퀴 등 각 부분들을 디자인한 것이었다. 채색 장식들은 눈길을 끌었고 다양한 형태와 색, 재료의 조합은 가구를 콜라주로 정의하는 원칙이 되었다. 이러한 사물들의 중점 또한 기능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지 않고 전적으로 감각적인 표현 방법을 연출하는 데 있었다. 이 '미완성 가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미술가는 클레멘테, 팔라디노, 키아 등이었다.
'스튜디오 알키미아'는 1980년대 초에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디자인 그룹이었고 수많은 전시회뿐 아니라 1980년 린츠에서 열린 선구적인 '포룸 디자인' 회의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1981년에 소사스는 '아키미아'를 탈퇴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룹 '멤피스'를 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