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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실험과 안티 디자인

예올 2022. 10. 3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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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유토피아, 그리고 안티 디자인

1960년대는 소비 사회와 기능주의가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중반 이후부터는 그 위기의 징후들이 하나둘씩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장의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이더니 1973년의 석유 위기와 함께 1970년대가 시작되었다. 

소비 사회 비판

대량 생산에 대한 낙관적 태도와 현대 디자인의 순수한 합목적적 합리주의를 점점 더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에서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많은 디자이너들이 더 이상 '산업의 하수인'이기를 거부하고 독립적인 실험 활동을 하면서 사회 개념들의 영향을 받아 정치 참여에 관심을 가졌다. 미국의 베트남 정책 반대, 프라하의 봄, 유럽의 학생 운동 등도 디자이너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1970년대 초 비판적 이론들이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었고, 사물의 기능에 대한 문제는 순수한 기술적 관점을 넘어 상징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확장되었다. 

 

기능주의의 위기

기능주의 이론은 아무런 새로운 해답도 줄 수 없었다. 이제는 미적인 전형 역시 디자인과 아주 동떨어진 영역에서 모색하게 되었다. 젊은 층의 하위 문화, 음악계, 팝아트, 영화 등에서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영국에서 시작하여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도 기능주의 건축을 비롯하여 산업과 디자인 단체들의 주류 디자인에 대한 격렬한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미국에서는 모던에 대한 비판적 논쟁에서 건축의 문화적, 심리적, 상징적 관점들에 중점을 두었으며, 포스트 모던 이론을 형성했던 최초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독일의 기능주의 비판

독일의 경우에는 전쟁 이후 곧바로 건축과 디자인에서 독단적인 기능주의를 지지했고, 그 결과 새로 조성된 교외의 대단위 주택 단지들은 그 부정적인 현상들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건축과 도시 계획에서 전적으로 합리적인 대량 생산만을 추구했던 순수 합목적적 합리주의의 정서적 결핍에 관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자인 과정에서 기능주의가 항상 디자인과 엄격하게 분리시켜 생각하고자 했던 미술의 역할 또한 다시금 논의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1965년 아도르노가 독일공작연맹에서 발표한 '오늘날의 기능주의'라는 강연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 강연에서 그는 순수주의적인 기능주의 근본 사상을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확대 해석하여 비판했고, "사용 적합성 외에 상징성을 갖지 않는 형태란 없다."고 단언했다. 

건축가 넬스는 1968년에 "기능주의의 영역은 이제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조립식 콘크리트 건물들의 비인간적인 형식주의를 비판하면서 "가장 큰 과오는 명료함과 엄격함의 원칙들이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을 초래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미처를리히 역시 '우리 도시의 황폐화'라고 단정 지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디자인의 역할에 대한 정치적 비판으로는 하우크의 '상품 미학 비판'이 있었다. 그는 디자인이 상품의 사용 가치를 감소시키고, 마케팅적인 이유에서 사용자를 잠시 눈속임하는 표피적인 번지르르함(스타일링)을 주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대안적 디자인

다양한 사회 비판적 시도들은 이론에 머물렀고, '공식적인' 산업 디자인은 사실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몇몇 디자이너들에겐 1970년대 초반에 자라난 산업 사회의 한계에 대한 의식(자원 부족과 환경 오염 등)을 반영하는 대안적 개념들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74년 그로스와 데스-인 그룹은 리사이클링 디자인과 개발, 생산, 판매의 대안적 방향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래서 옵셋 인쇄판이 전등갓으로, 차를 담았던 나무 상자가 옷장으로, 자동차 타이어가 소파로 디자인되었다. 

뮌헨 출신의 마우러는 전등의 기능을 심사숙고하여 이를 역설적으로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험적 프로젝트들은 당시 경제적으로 적절하지 못했고, 대기업의 산업 디자인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자에겐 새로운 길을 열어놓았다. 그중 하나가 자가 제작 물결인데, 덕분에 건축 자재 매장이나 가구 픽업 매장(이케아처럼 스스로 조립하도록 가구를 부품 형태로 판매하는 대형 가구 매장)들은 지금도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탈리아의 저항 운동

이탈리아 디자인의 특징은 문화적인 것뿐만 아니라 철학적, 정치적, 사회 비판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1960년대 후반에는 교육 여건과 작업 조건, 그리고 산업 제품의 소비 지향적인 '벨 디자인'에 불만을 가진 신세대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우아한 개별 제품만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이고 개념적이며 전 세계적인 시각에서 생각하고자 했다. 그리고 소비 사회의 정치적 견제 조건들과 마찬가지로 디자인 과정 또한 새롭게 재고해 보려고 했다. 

이러한 '래디컬 디자인'의 구심점은 밀라노와 피렌체, 토리노로 이곳에서는 '인간 존재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새롭고 포괄적인 시도를 완성해 보려는 그룹들이 결성되었다. 

기존의 주류 디자인과 소비지상주의, 물신숭배주의에 대한 저항은 주로 드로잉이나 사진 몽타주, 유토피아적인 프로젝트의 구상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안티 디자인'의 철학은 철저하게 비상업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정치적이거나 역설적, 또는 도전적인 의미를 갖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사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형태들은 팝아트나 미니멀 아트의 영향을 받았고, 해프닝이나 퍼포먼스, 또는 이와 유사한 양식들은 1960년대의 개념 미술에서 받아들였다. 

소사스는 이러한 저항 운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일찍이 자신의 가구와 도자기에 팝아트의 형태들을 차용했으며, 유토피아적인 대안 공간을 디자인했다. 그의 작품들과 이론들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안티 디자인'의 이정표가 되었다. 

최초의 그룹 중 하나인 '아르키줌'은 1966년 피렌체에서 프란치와 데가넬로에 의해 결성되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신분 상징으로서 우아한 디자인에 반대하면서 건축과 도시 계획에 대해 이론적으로 고찰했다. 또 다른 그룹 '스트룸'은 건축과 디자인을 정치적인 선전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고, 팝아트의 영향을 받은 가구들을 디자인했는데, 이 가구들은 마치 강렬한 색상을 갖는 조각품처럼 공간을 차지했다. 

안티 디자인 대표자들의 비판적인 기본 태도는 문화 비관론으로 빠져들었고, 원칙적으로는 모든 사물을 전적으로 기피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비관적 태도는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소사스를 비롯한 많은 디자이너들은 실제로 디자인 활동을 당분간 중단한 채 그저 이론이나 드로잉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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