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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포름과 벨 디자인

예올 2022. 10. 3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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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포름'과 신기능주의

울름 조형 대학은 여러 가지 결과들을 낳았다. 우선 1960년대의 독일 디자인에서 기능주의와 '굿 포름'은 다양한 교육 기관과 디자인센터, 그리고 디자인 협회 등에서 빈번히 노골적이고도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스타일의 원리가 되었다. 울름 조형 대학의 강사들은 브라운, 비트소에, 로젠탈 등의 회사와 손잡고 일했는데, 그 회사들의 제품은 전 세계적으로 '굿 포름'과 '독일 디자인'의 전형이 되었다.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측면들이 디자인에서 전면으로 부각되었고,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자신을 조형 미술가라기보다 엔지니어로 이해했으며, 인간 공학이 새로운 활동 영역으로 등장했다. 

 

※빌헬름 바겐펠트(1900-1990)  독일 현대 산업 디자인의 아버지이자 '굿 포름'의 대표적인 주창자이기도 하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모호이-노디 밑에서 공부했고, 1925년부터는 조교로 활동하다가, 1929년부터는 바이마르 건축 대학의 학장으로 재직했다. 그의 간결하고 '시간을 초월한' 형태들은 제3제국이 요구하는 영원성에 위배되지 않았다. 1935년에 루사티아 지방 유리 공장 연합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당시에 이미 대량 생산을 위해 적층이 가능한 기하학적인 육면체 형태의 시스템 식기와 유리잔들을 개발했다. 전쟁 이후에는 베를린 예술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했고 새로운 공작 연맹의 창립 동인이기도 했으며, 1957년에는 잡지 '포름'의 창간에 참여했다. 바겐펠트는 전쟁 이전과 전쟁 중 그리고 전쟁 이후에도 예나 유리 공장, 베엠에프, 로젠탈, 토마스 브라운, 아들러 등의 회사들과 일했다. 그의 디자인들 중 대다수가 오늘날까지도 계속 생산되거나 '디자인의 고전'으로 다시 생산되고 있다. 

 

울름 조형 대학의 해방적이고 비판적인 원칙이 소수 지식인들에게 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직각의 형태와 울름의 시스템적 사고는 대량 생산에 적용되었다. 이는 모듈 시스템 제품들이 실제로 저렴하고 합리적인 생산을 가능케 했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수많은 회사들의 제품 언어가 표면적으로 점점 더 비슷해져 갔다. 

형태들은 좀 더 딱딱해지고 각이 지고 즉물적으로 변해 갔고, 그만큼 무미건조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저 표면적으로 직각을 차용한 조악한 기능주의의 모조품들은 빈번히 단조로운 대량 상품들이거나, 도시적인 생활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메마른 위성 도시와 조립식 주거 단지들로 치달았고 이는 자주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굿 포름(Gute Form) : 기능성, 단순한 형태, 높은 사용 가치, 긴 수명, '시간을 초월한' 유효성, 질서, 명확성, 훌륭한 가공성, 재료 적합성, 완벽한 디테일, 테크놀로지, 인체 공학적 적합성, 환경 친화성. 

 

이탈리아 : 벨 디자인

이탈리아 역시 1960년대에는 풍요와 대량 소비의 시대를 경험했다. 독일에 '굿 포름'이 있었다면, 이탈리아에는 '벨 디자인(아름다운 디자인)'이 있었다. 이것 역시 대기업의 주류 디자인을 대변하는 개념으로 합리적이고 생산 중심적이었으나, 디자인에 관한 한 다른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었다. 브라운의 제품들이 'TS45' 같이 객관적이고 기술적인 모델명을 갖고 있었던 반면 1969년에 소사스가 올리베티를 위해 디자인한 여행용 타자기는 '발렌타인'이라는 이름으로, 피레티의 유명한 접이식 의자는 '플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제품들을 개별 인격체로 이해했기에 상징물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제품은 디자인 오브제가 되었다. 이러한 디자인 의식은 수출 지향적이었던 이탈리아 경제에 대단히 중요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관점은 디자인을 문화의 한 부분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올리베티나 피아트 등의 대기업들은 의식적으로 유명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했고, 이탈리아에서는 독자적으로 다양한 회사들을 상대하여 자문해 주는 '컨설턴트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이탈리아에서 코퍼레이트 아이덴티티라는 개념은 고유하면서도 문화적인 차원을 획득했던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소사스, 차누소, 벨리니 등의 젊은 디자이너나 건축가들과 함께 일했던 올리베티의 경영 정책을 들 수 있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새롭게 시작된 전자 분야에서 컨설턴트 디자이너로서 활동했던 소사스는 신형 컴퓨터의 기능적인 디자인만을 특별히 담당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관계'와 홍보 활동을 위한 독자적인 부서까지 담당하면서 경영진과 직접 접촉했다. 이러한 개방적 태도는 디자인을 일찍부터 회사 경영 정책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만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디자인은 전문가들이 엔지니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건축가, 철학가, 작가가 다 같이 참여해야 하는 분야였다. 

도르플레스, 아르간, 그레고티, 에코 같은 이탈리아의 저명한 디자인 이론가들은 수많은 건축과 디자인 잡지에서 사회 전반에 걸친 디자인에 관한 논의를 이끌어 냈으며, 이는 지금까지고 계속적으로 공론화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198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독일에 전해졌다. 

이탈리아 디자인의 세 번째 특성은 실험을 즐기는 성향으로 이는 1960년대 중반부터 신소재 플라스틱이 가져다 준 거의 무한한 가능성을 통해 촉진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디자인을 통해 새로운 발전을 주도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선도적 우수성은 1972년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이탈리아: 새로운 실내 풍경' 전에서 분명히 들어났다. 그동안에 수백 마르크를 호가하며 장서가들의 수집품으로 거래되고 있는 이 전시 카탈로그는 당시 이탈리아 디자인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떨쳤다. 이 전시에서는 주류 디자인과 안티 디자인, 우아함과 실험, 고전적인 것과 도전적인 것 등을 동시에 나란히 선보였다. 이 전시는 이탈리아의 디자인을 특징짓는 관용과 개방성을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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