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지금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전후 시기와 1950년대는 '약동의 50년대'로 미화되어 있으며, 정치뿐 아니라 디자인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우선 재건에 여념이 없었다. 전후 초기에는 식량, 주택, 경제 건설, 국가와 행정 재건 등 기본적인 욕구부터 충족시켜야 했다. 회사들은 거의 모두 해체되었고, 자원과 노동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사회적이고 창조적인 이상향들은 독일과 제3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에서는 나치 정권에 의해서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스탈린 체제에 의해서 단절되었다.
미국은 전쟁의 피해를 모면한 유일한 승전국으로서 경제 개발을 주도했고 1950년대까지 선두적인 디자인 국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바우하우스의 주요 인물들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동안 미국으로 망명한 상태였으므로 그곳에서 모던 건축과 디자인을 국제적 양식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이렇게 해서 망명을 떠났던 '모던'이 미국에서 유럽으로 역수입되었고, 동시에 디자인은 판매 촉진을 위한 수단으로써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다. '미국식 생활 방식'은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음악과 미술, 소비 행태, 일상생활 등 모든 문화 영역과 생활 영역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영화와 광고 매체는 유럽의 미적 이상향과 유행의 물결에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코카콜라와 럭키 스트라이크는 새 생활의 상징이 되었다.
주택 인테리어의 유기적 디자인
미국은 이미 1930년대에 독일에서 '모던'을 유입하여 미술과 건축, 디자인에서 선두적인 역할을 해 왔다. 무엇보다도 현대 디자인의 문제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독단적으로 바로 보지 않았다.
뉴욕 현대 미술관은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를 규명했다. 뉴욕 현대 미술관은 1934년부터 디자인 소장품을 광범위하게 보유해 왔으며, 1941년에는 블루밍데일스 백화점의 협찬을 받아 '주택 인테리어의 유기적 디자인'이라는 주제로 인테리어 용품과 섬유 등을 위한 새로운 형태들을 시대에 걸맞도록 개발하는 공모전을 주최했다. 기능주의의 엄격하고 기하학적인 형태가 아니라 인간의 몸에 적합한 활기차고 가벼운 선을 개발하는 것이 공모전의 목표였다. 공모전에서 수상한 사리넨과 임스는 유기적으로 흐르는 곡선을 이용해 아름답고도 안락한 반구형 목재 안락의자를 선보였다. 사리넨과 임수는 크래브룩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베르토이아와 함께 새로운 유기적 스타일을 개발한 걸출한 선두주자로 손꼽힌다. 그들은 주로 폴리에스테르, 알루미늄, 합판 등의 재료를 가지고 작업했다. 하지만 그들의 가구는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이 해결되고, 임수가 미 해군을 위해 개발한 목재 가공 기술과 플라스틱 가공 기술로 부드럽고 유기적인 형태를 만들 수 있었던 1945년 이후부터 생산할 수 있었다. 가국 생산업체였던 허먼 밀러와 크놀 인터내셔널은 크랜브룩 아카데미의 활동을 후원했고, 수많은 디자인 개발품들이 대량 생산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밀러와 크놀은 훗날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 가구 생산업체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대 미술의 형태들 또한 건축과 디자인, 광고에서 그 활로를 찾았다. 이러한 본보기를 보연 준 현대 미술가로는 아라프, 무어, 칼더 등이 있었고, 블루밍데일스나 본위트 텔러처럼 실험적인 것을 선호하는 백화점의 쇼윈도를 장식하다가 작가된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식 생활방식
미국에서는 이미 1930년대에 그들 나름대로 디자인을 규정했는데, 유럽과 달리 판매 촉진을 위한 수단으로써 특히 '스타일링'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대량 소비를 일으키는 것이 디자인의 목표가 되었다. 유럽 '모던'의 대표자들 대부분은 망명지 미국에서 활동하며 국제적 스타일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이전의 시대에는 유선형과 새로운 유기적 형태들을 산업 디자인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으로 선호했다. 193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는 티그, 드레이퍼스, 벨 게디스, 로위 등인데 그들이 미국이 산업 디자인을 지속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미국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유럽보다는 훨씬 적었지만 전시 경제 체제를 평시 체제로 전환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전쟁 중에 많은 회사들이 완전히 군사적 목적으로만 운영되면서 민간 연구는 금지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생산 기술을 접목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소비와 진보
전후 회복을 위한 첫번째 정책은 소비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후 1950년대 초반에 이르러 생활 필수품이 넉넉해지자 기업들은 이제 더욱더 새로운 모델과 형태, 기술 개선 등을 통해 새로운 수요를 지속적으로 창출해야만 했다. 제품 모델들은 마케팅과 광고에 힘입어 점점 더 빠르게 바뀌었다. 이에 따라 광고와 더불어 포장 디자인의 중요성도 날로 더해 갔다.
가장 중요한 분야는 역시 자동차와 가정용품이었다. '비행기의 코'와 '비행기 꼬리 날개'를 달은 미국식 꿈의 자동차 스타일이 생겨났고, 또한 가정에서는 주부들의 가사 노동을 덜어주는 가전제품들이 넘쳐났다. 텔레비전과 트랜지스터 기술의 빠른 발전은 끊임없이 시장을 넓혀 나가다. 반면에 일본의 기업들은 1950년대부터 이 분양에 진출하여, 점점 더 작아진 제품들을 가지고 미국의 전자 회사들과 경쟁했다. 하지만 1950년대 말까지 미국 경제의 미래는 아주 낙관적인 전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