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데코 인터내셔널
아르데코란 원래 프랑스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 형태들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유럽 전역과 바다 넘어서까지 큰 호응을 얻었다. 아르데코의 전 세계적인 확장을 보여 주는 가장 유명한 예가 인도르에 있는 마하라차의 궁이다. 인도의 군주였던 마하라차는 옥스포드 대학 시절 독일의 젊은 건축가 무테지우스(1914년 쾰른 공작 연맹 회의에서 '규격화'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한 헤르만 무테지우스의 아들)를 만나 궁전의 건축과 실내 디자인을 의뢰했다. 무테지우스는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들을 끌어들였고, 자신도 붉은 래커와 검정 플라스틱을 사용한 의자 시리즈와 조명등, 건물 벽의 미장, 독서용 전등 및 재떨이가 내장된 도서관 안락의자 등 과감한 디자인을 개발했다.
산업적 대량 생산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아르데코의 형태는 모던한 세련미의 표현으로 주목 받았고, 무엇보다 알루미늄과 베이클라이트 등의 새로운 재료를 이용한 대량 생산품들은 갈수록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패션 액세서리, 담뱃갑, 라디오 케이스, 향수병 등은 고전적인 기하학 형태, 표현주의적인 지그재그 문양, 또는 상아나 거북이 등껍질의 특성을 모방한 장식이 많은 플라스틱 상감 세공으로 제작되었다.
미국의 아르데코
1920년대 미국에서 유럽의 '모던'에 대한 개념이란 여전히 바우하우스와 그 밖의 경향들을 계속 지켜보았던 몇몇 아방가르드 건축가들에게나 관심거리일 뿐이었다. 라이트가 모던 건축의 선구자로 등장했고, 20세기를 앞두었던 시기에 이미 철골 구조의 고층 빌딩들이 들어섰지만 화려한 신고딕 양식으로 지은 뉴욕의 울워스 빌딩(1913)처럼 1920년대 말까지도 건물들의 파사드는 여전히 역사주의적인 창틀과 돌출창, 고딕식 아치로 치장하고 있었다.
가구와 인테리어 용품들 역시 견실한 식민지 스타일과 역사주의적인 유럽 스타일을 선호하는 중류층과 상류층의 보수적인 취향에 맞춰 수공업적으로 생산했다. '미술공예운동' 외에는 그 어떤 개혁운동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던에 대한 개념은 바우하우스 사람들과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들에 의해 확산되기 시작했다. 1932년 디트로이트에 설립된 크랜브룩 아카데미에서 모던 개념을 소개했는데, 핀란드의 건축가 사리넨 교장은 이 학교를 바우하우스의 분교로 보았다.
비록 건축과 공간 디자인에 국한되었지만, 기능주의적인 모던함보다는 장식성이 풍부한 아르데코가 관철되기 시작하여 1920년대 후반부터는 대기업의 과시적인 사옥들이 아르데코 스타일로 지어졌다.
미국의 아르데코 사례는 뉴욕과 마이애미의 대형 고층 빌딩과 화려한 극장 등에 잘 나타난다. 뱃머리와 난간이 있는 대형 호화 여객선을 모티브로 하여 고급 목재, 대리석, 황동 상감 등으로 장식했고, 다채로운 유리와 타일을 비롯하여 기하학적이고 표현적인 형태들을 사용했다.
1930년대 미국에서는 화려한 장식의 아르데코에서 이어진 무미건조한 미국식 스타일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세계 경제 대공황에 대한 정부의 조치로 즉물적이고 값싼 건축 방식을 장려한 것이었다. 역시 경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아르데코 형태는 새로이 등장한 유선형의 모습으로 수많은 대량 생산품에서 나타났다. 미국이 아르데코에 공헌한 사례를 말하라고 한다면 바로 유선형이다.
※ 뉴욕의 아르데코 건축물
- 라디오 시티 음악 홀, 1931, 건축가 레이먼드 후드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1932, 건축가 슈리브, 람, 하르먼
- 록펠러 센터, 1931, 건축가 레이먼드 후드
- 크라이슬러 빌딩, 1930, 건축가 윌리엄 밴 앨런
현대 산업 디자인
미국의 모던 디자인은 그 나름대로의 길로 나아갔다. 유럽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 어느 곳보다도 소비 행태에 따라 좌우되었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거보다 높은 수준의 기술적 진보와 전 세대에 걸쳐 미적 감각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꿈의 공장 할리우드의 이상향에 따라 특화되었다.
디자인과 기술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발전이 현저하게 제한되었던 반면, 미국은 1920년대 초에 이르러 다른 산업 국가들보다 월등히 높은 고도의 기술 수준을 갖추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대부분의 중산층 가정이 라디오, 냉장고, 토스터, 세탁기, 텔레비전 등의 가전제품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듯 미국에서는 일찍이 가구 디자인과 산업 디자인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폭넓은 대중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새롭고 저렴한 재료를 통한 대량 생산은 이미 필수적인 일이 되었고, 1920년대 말경에는 당시 한참 성장하던 광고계에서 현대적인 시장 연구의 결과들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광고와 포장 외에도 구매력이 있는 중산층을 만족시켜야 했으므로 제품의 세련된 디자인은 더욱 중요해졌다.
당시에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동차를 비롯한 기술 제품들의 디자인은 오직 실용적인 기능과 초기 생산 라인의 기술적인 요구 사항들만 맞추는 형편이었다. 포드의 '모델 T'는 1913년 당시만 해도 경쟁 제품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르자 경쟁사들이 급속히 성장했으므로 수많은 제품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디자인이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디자인의 혁신이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문제 제기 속에서 끊임없이 논의되었던 유럽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마케팅의 한 요소일 뿐이었다. 이렇듯 새로운 디자인 개념은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의 결과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