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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혁명과 아방가르드_독일 바우하우스(2)

예올 2022. 10. 13.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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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바우하우스의 건축_미국

그로피우스, 앨버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 대학의 강단에 섰고, 모호이-노디는 1937년 시카고에서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했다. 현대의 명료하고 장식 없는 형태들은 기능주의의 이론을 따른 것이다. 그 이론에 따르자면 형태란 기능에 의해 결정되는 결과이고, 장식이란 산업적 대량 생산을 저해하고 생산 단가를 높이는 쓸모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해를 끼친다. 거기에서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는 기계 생산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바우하우스의 형태와 재료 등은 특히 현대 건축과 산업적 대량 생산이 노동자들을 위한 저렴함 주택과 가구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사회적 관점을 잘 입증해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다양한 개혁 운동의 한결같은 목표였다. 

독일의 사회  복지 주택 건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의 시기에 독일 아방가르드 건축가들의 최고 목표는 저렴한 주거 공간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크 시는 마이의 책임 아래 대대적인 주택 건설 계획을 실현시켰다. 그 목적이 '최저 생계를 위한 주택'이었던 만큼 모든 것들이 가능한 한 저렴해야 했다. 그래서 건축가 크라머는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 좁은 공간을 위한 저렴하고 실용적인 생활용품과 합판으로 가볍게 만든 조립식 가구들을 디자인했다. 1929년에는 베를린에서 '저렴하고 아름다운 주택'이라는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대도시들마다 시범 주택과 시범 주택 단지가 만들어졌는데, 이를 통해 미래의 세입자들에게 '합목적적이고 아름다운' 일상 용품들로 꾸민 인테리어를 소개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범 주택 단지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 집단 주택 단지였다. 이 주택 단지는 1927년 '주택'이라는 독일공작연맹의 전시회를 위해 건설되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지휘 아래 공장에서 양산된 콘크리트 벽 부품들로 집을 시공했고, 슈탐, 오우트, 르 코르뷔지에 등의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이 전시는 아방가르드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의 국제회의가 되었고, 양차 대전 사이의 시기에 건설한 독일의 사회 복지 주택은 미국의 건축가들에게 형식적인 면에서 대표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새로운 과제는 도시적 주택으로서 수영장, 카페, 바, 스포츠 센터 등의 공공 공간들을 갖춘 고층 빌딩의 건축이었다. 그로피우스는 1930년 파리에서 개최된 공작 연맹 전시회에서 유리와 철, 공기와 빛을 이용한 공공 공간의 인테리어를 선보였다. 이 전시는 독일 디자인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피우스는 새로운 재료와 차갑고 즉물적인 형태들로 현대적이고 대도시적인 삶의 느낌을 담아냈다. 

그러나 기능주의는 이미 형식주의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었다. 새로운 형태들이란 언제나 새롭고 진보적인 입장의 상징으로 미화되었고, 지적이고 고상한 취향을 가진 엘리트 계층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산업과 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단지 노동자의 지위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아주 새로운 사회 계층을 만들어 냈다. 고소득을 받는 이 직장인 계층은 기술 지향적이고 모던하며 활동적인 태도를 보였다. 스틸 파이프로 만든 안락의자는 이들의 취향에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이들은 1920년대 중반부터 세계 경제 대공황 전까지 호황을 누리던 시기에 산업적으로 생산된 재료들이 보여주는 차가운 우아함을 선호했다. 

 

국제 양식

모던 디자인은 미국에서는 라이트에 의해, 유럽에서는 로스와 베렌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1920년대 중반부터 건축과 디자인에서 국제적인 형태 언어로 나타났다. 바우하우스의 형태들은 '국제 양식'이 되었는데, 이 개념은 미국의 건축가 히치콕과 존슨에 의해 특징지어졌다. 그들은 1932년에 '국제양식-1922년부터의 건축'을 출간했고, 그 해에 1929년에 개관한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같은 제목의 전시를 기획했다. 국제 양식은 무엇보다 건축에 관계된 것이었다. 히치콕과 존슨은 건축은 더 이상 매스가 아니라 볼륨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더 이상 축 대칭이 아니라 명료한 규칙으로 디자인이 결정되어야 하고 그 어떤 장식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건축에서처럼 가구에서도 장식적인 문양들을 배제했고 명료함, 투명함, 우아함, 합리성 등을 중시했다. 구체적으로는 프랑스와 독일의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브로이어 등의 디자인을 꼽았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핀단드의 건축가 알토가 200개가 넘는 개인 건물과 공공건물들을 통해 모던 건축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건축의 유기적 구성 요소로서, 그리고 모든 건축 과제들과 연관 지어 가구를 디자인했다. 그렇게 하여 핀란드의 옛 도시였던 비푸리의 시립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의자나 호흡기 질환 요양소인 파이미오에서 쓰는 안락의자가 만들어졌다. 이때 알토는 합판을 원하는 형태로 휘어서 제작했다. 

알토는 자체 탄성을 갖는 의자의 원리와 우아한 아름다움을 스틸 파이프와는 반대로 따뜻한 느낌을 주는 자작나무 합판을 휘어서 실현시켰던 것이다. 이 가구들은 1930년대 중반부터 당시 알토 자신이 창립한 회사 아르텍에서 생산했다. 

그렇지만 독일에서 수많은 바우하우스 사람들이 망명을 떠나고 난 뒤 1930년대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미국이었다. 이때부터 뉴욕의 현대 미술관은 새로운 국제적 경향들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전시와 공모전 등을 통해 여론을 주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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